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지외의 테레사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8u0lM7Sod-I)]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4qzAbfA2ipc)] }}}|| 1873년 1월 2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가 근처에 있는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시계공인 아버지 루이 마르탱 성인, 레이스 제조공이었던 어머니 젤리 마르탱[* 결혼전 성은 게랭.] 성녀 슬하의 9남매 중 막내였다. 이들 가운데 테레사를 포함한 5명의 딸만이 어른이 될 나이까지 성장했다. 테레사의 가족은 매우 신앙심이 깊었는데, 본래 부모님도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혼했고, 4명의 언니들도 수녀의 길을 선택했을 정도였다.[* 테레사는 자신의 자서전에 "[[야훼|하느님]]께서는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에 더 어울리시는 부모님을 제게 주셨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말은 리지외에 위치한 테레사 부모의 묘비에도 새겨졌다.] 이러한 가정 속의 모범적 신앙생활을 인정받아 소화 테레사의 부모는 2008년 [[복자|시복]]되었고, 2015년에는 성인으로 함께 [[시성]]되었다.[[https://maria.catholic.or.kr/sa_ho/board/board_print.asp?menugubun=saint&ctxtOrgNum=&ctxtOtherMenu=&ctxtOtherID=&ctxtSubMenu=pds&infogubun=info&orggubun=101&bbsgubun=pds&infoid=249&bbscount=26&maingroup=&gubun=&seq=&group_id=&sub_id=&page=1&id=43960&table=gnattboard&user_auth=&RecHostcle=&getID=&getSeq=&Mode=&keyfield=&key=&ctxtHigh=&ctxtLow=&pType=P|#]][* 이들 부부의 축일은 [[7월 12일]]인데, 바로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다.] [[http://sihm.or.kr/avemaria/sub06/sub6-3-52.html|소화 테레사 부모의 일대기]] [[파일:teresamary.jpg]] 테레사의 나이 5세였을 때 어머니가 선종했다. 그리고 테레사가 10살 때에 엄마 역할을 대신해 왔던 둘째 언니 폴린이 [[수녀원]]에 들어갔다. 테레사는 상실감에 빠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게 되었다. 가족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는데, 테레사가 집 방안에 있던 [[성모]]상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체험을 한 뒤 곧바로 병이 치유되었다.[* 현재 [[프랑스]] 리지외에 위치한 소화 테레사의 옛날 집에는 이 [[성모]]상의 복제품이 전시 중이다. 진품은 테레사가 생전에 활동했던 [[수녀원]]에 안치된 테레사 유해의 유리관 곁에 위치하고 있다.] 이듬해에는 첫 [[영성체]]를 모시게 된다. [[파일:teresafather.png]] 13살이 된 1886년 테레사는 자신도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한다.[* 이러한 테레사의 결심은 자신의 독실한 신앙심에 더하여, 앞서 수녀가 된 언니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도 상당 부분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어린 나이[* 오늘날은 대개 만 18세 이상부터 [[수도회]] 입회가 가능하다.]로 인해 불허된다. 이듬해 1887년 [[이탈리아]] [[로마]] 순례 때 당시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테레사는 교황에게 자신의 [[수녀원]] 입회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는데,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 언뜻 테레사의 신앙심을 높이 사서 격려해준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다짜고짜 보채는 어린 소녀 앞에서 마지못해 모호한 대답을 해준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테레사가 계속 간청하자 보다 못한 [[바티칸]] 근위병들이 강제로(…) 끌고 나갔다. [[파일:teresapope.jpg]] 다행히 테레사가 살던 리지외 현지의 [[주교]]가 이 소식을 듣고서는, 테레사의 결심을 확인하고서 [[가르멜 수도회|가르멜 봉쇄수녀원]] 입회를 허락해주었다. 1888년, 나이가 불과 15세 때 일이었다. 이때부터 '아기 예수의 데레사'(Thérèse de l'Enfant-Jés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파일:teresasisters.png]] (수녀가 된 친언니들과 함께. 맨 오른쪽이 테레사) 수녀원 생활 당시에 테레사는 부각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고, 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조용히 자신의 몫을 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테레사는 이를 '작은 길'이라고 불렀다. 이후 수녀원 입회 이듬해인 1889년에 수련을 받은 데 이어서, 1890년에는 수도서원을 발하여 정식으로 수녀가 되었다. [[파일:teresafinal.jpg]] ([[결핵]]으로 투병 중인 테레사) 그러던 1896년 결핵에 걸려 각혈 증상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결핵이 불치병에 가까웠고, 테레사의 건강은 치명적으로 나빠졌다.[* 당시 투병기간 중의 한 일화로, 어느 선배 수녀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한 테레사를 대신해서 그녀의 수녀복에 고정용 핀을 꽂아주었는데, 그만 실수로 핀이 테레사의 살갗을 뚫은 채 하루를 지냈다. 그럼에도 테레사는 아픈 내색조차 없이 참고 지냈으며, 이를 뒤늦게 알고 사과한 선배 수녀에게 "덕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며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 결국 1년 동안 투병하던 끝에 테레사는 1897년 선종했다. 불과 24세, 수녀원 생활 9년 만에 너무나도 짧은 생을 마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